상상력 넘치는 이야기 보따리책 <김선우의 사물들>
작가는 사물의 혼을 불어 넣어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사람이다. <김선우의 사물들>은 상상력 넘치는 이야기 보따리책이다. 작가의 삶이 녹아 있는 '사물'들의 이야기를 읽고 있으면 평범한 사물들이 살아 숨 쉬는 것 같다. 이 책을 읽고 있으면 내 인생의 사물 이야기 하나 꺼내고 쓰고 싶어진다. 글은 특별한 것을 써야 된다는 생각이 사라지고 내 주변의 시시콜콜한 사물들이 글로 탄생되는 것이 신기할 뿐이다. 글이란 자신의 삶을 쓰는 것. 사람관계에 지쳐 있을 때, 또는 글을 쓰고 싶은데 어떤 글을 써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다면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사물을 관찰하면서 평범한 사물들의 소중함을 느끼고 사물과 연결된 나를 들여다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되리라.
책은 숟가락, 거울, 의자, 반지, 촛불, 못, 시계들, 바늘, 소라 껍데기, 부재, 손톱깍이, 걸레, 생리대, 잔, 쓰레기통, 화장대, 지도, 수의, 사진기, 휴대폰 등 스무 가지 사물에 말을 걸고 섬세한 문체로 감성을 자극한다. 상상력 넘치는 이야기 보따리책이다. 순서 없이 원하는 읽고 싶은 사물을 하나 골라 읽어도 좋다.
작은 '반지'를 이야기는 마음이 따뜻해진다. 작가는 엄마가 결혼 13년만에 장만한 은반지 하나를 받았다. 그런데 반지가 손에 맞지 않아 끼우지 못했다. 고생으로 굵어진 엄마 손가락에 맞던 반지가 곱디고운 딸 손에는 맞지 않았던 것. 사는 게 힘들어 엄살 부리고 싶을 때는 엄마가 준 반지를 끼며 엄마와 연결을 한다. 엄마의 반지를 통해 삶의 치유를 받는 것 같다. 동그랗고 작은 반지가 신비한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사는게 버겁다고 느낄 때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으면 힘이 난다. 옆에 없지만 추억의 사물 하나가 있으면 그 사람과 바로 연결된다. 현재의 나를 위로하고 품어주는 듯하다.
사진:pixabay
"물은 거울의 기원이다. 인간이 '거울'이라는 사물을 창조해낼 수 있었던 것은 아주 먼 옛날 인간의 조상이 물속을 들여다 본 기억을 가지고 있기 때문 일것이다. 만물의 근원인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의 질료 중 사물의 얼굴을 비추어주는 것은 유일하게 물이다."-34쪽
우리는 매일 거울을 보지만 거울의 기원을 생각해 낸 적은 없다. 그저 화장할 때 나를 예쁘게 만들어주고 사람들 만날 때 얼굴에 뭐라도 묻어 있는지 용모는 단정한지 보기 위해 보는 거울. 작가의 글을 읽고보니 최초의 거울은 물이었다는 걸 새삼 생각해본다. 어린 시절 냇가나 우물에 비친 내 얼굴을 보고 놀았던 기억이 있다. 물은 형태는 없지만 다른 사물을 품어주는 신기한 물건이다. 며칠 전, 새로 지은 아파트 단지에 간 적 있었다. 큰 아파트 단지 옆에는 작은 습지가 있었는데 습지에 비친 아파트 모습이 이질적으로 보였다. 저렇게 큰 아파트를 작은 습지 안에 담을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그것이 물의 힘이다. 거울도 마찬가지다. 거울보다 자신 물체나 건물들을 비추어 준다. 작지만 세상을 모두 품을 듯이 말이다.
사진:pixabay
여러가지 사물 중 마음을 흥미로웠던 것은 '바늘'에 대한 글이었다. '글썽이는 자의 숨은 꿈'이라는 부제가 붙은 글에는 엄마와 할머니의 바늘집 이야기가 나온다. 할머니와 엄마는 한 집에 살았지만 각기 다른 바늘집을 가지고 있었다. 할머니 반짇고리는 대나무 껍질로 만들어진 것으로 바늘이 단정하게 들어 있었다. 하지만 엄마의 반짇고리는 온갖 자추리천과 단추, 호크들이 가득 들어 있어 만물상 같은 느낌이라면 할머니 반짇고리는 한옥의 후원같은 느낌이라고 말한다. 서로 다른 반짇고리였지만 두 분이 함께 즐겨쓰는 것은 머리카락으로 채운 바늘집이었다. 엄마의 바늘집에는 엄마의 처녀적 머리카락으로 채워져 있고 할머니의 바늘집은 할머니의 처녀적 머리카락으로 채워져 있다는 것이었다. 그 옛날에는 시집 오기 전, 집에서 반짇고리를 가져왔다는 것이 나에게는 놀라운 일이다. 두 여인이 나이도 다르고 시어머니와 며느리라는 특별한 관계이긴 하지만 바늘 집만은 똑같이 윤기나고 반짝거리던 처녀 적의 바늘집을 쓰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는 것이 감동적이다. 독자로서 이런 귀한 이야기를 읽을 수 있어 감동이다.
책에는 작가의 사유와 혼이 담긴 문장들이 가득하다.
"봄밤이다. 먼 산 능선에 홍반처럼 번져있던 산벚꽃들은 이미 스스로의 열기 속으로 사라졌다. 꽃이 자기 얼굴을 알아보기 시작할 때, 꽃은 진다. 사람의 삶도 어쩌면 그러할 것이다. ". 거울에 대한 글의 첫 문장이다. 봄밤에 벚꽃 흐드러진 열기 속에 내가 들어가 있는 듯 황홀하다. "꽃이 자기 얼굴을 알아보기 시작할 때 꽃이 진다."는 표현은 내 맘 속에 꽃물을 들인 듯 통증이 느껴진다. 짧은 한 줄에 젊음이 안개처럼 잠시 왔다 사라진다는 걸 표현한 작가의 사유가 놀랍다.
"소라껍데기는 사물인가. 우리가 흔히 '사물'이라고 아주 딱딱하게 규정하는 사물들의 기원은 따스하다. 그 어느 것이나 이 별의 핏물이 스며들고 고동치는 따쓰한 맥박이 번져있다. 소라 껍데기를 들여다보다가 중얼거린다. 나는, 누구의 집이 되어줄 수 있을 것인가." 소라는 생명체지이지만 알맹이가 없으면 생명력이 사라진다. 소라 껍데기를 보고 누군가의 마음의 집을 생각해내는 작가의 따스한 마음이 느껴지는 글이다.
<김선우의 사물들>의 삽화는 우창헌 화백이 스무 개의 사물에 대해 해석하여 독창적으로 그려내냈다. 글의 내용을 잘 보여주는 듯하면서도 사뭇 다른 화가의 따뜻하고 날카롭고 통찰력 있는 해석이 그림을 보는 행복을 안겨 주고 있다.
지나간 시간이 그리울 때, 내 일상이 시시하게 여겨질 때, 누군가 미치도록 보고 싶을 때, 스쳐가는 바람소리에도 눈물이 나서 실컷 울고 싶을 때 이 책을 보고 있으면 마음에 밤 하늘에 뜬 별처럼 자신이 누구인지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 주위에 있지만 소중함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물들처럼 자신의 삶의 의미도 되새겨 볼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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